* 구글 크롬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크롬으로 접속하셔야 원활한 이용이 가능합니다.[다운로드] *
컨텐츠 바로가기 영역
주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HOME

교수동정

본교 권성달 교수님 국민일보 특별기고
작성일
2014.08.06
조회수
5777

 

[특별기고-권성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가자지구에 이스라엘 지상군이 투입된 지 이미 2주가 지났다. 가자지구의 사망자는 이미 1200명을 훌쩍 넘어섰다. 희생자들 가운데는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이스라엘 탱크가 유엔이 운영하는 학교에 포격을 가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세계의 비난은 더욱 거세어지지만 600만명이나 대학살을 당한 홀로코스트 때 전 세계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냉담한 반응을 이미 경험한 유대인들이기에 세계의 여론이 이스라엘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번 기회를 통해 이스라엘의 안전에 위협을 가하는 하마스의 근거지를 찾아 발본색원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유학 생활 중에 포격을 당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참 어렵고 예민한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이는 그 문제를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의 시각이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인도주의적 관점이 아닌 성경적,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도 시각의 차이가 클 수 있는데, 대표적인 두 극단적 견해는 이렇다.

첫째,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부여해 주신 거룩한 약속의 땅이며 유대인은 여전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선민)으로서의 효력이 있으므로 유대인들을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이들로 보는 시각이다. 둘째, 성경이 말하는 참된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인을 뜻하는 교회이며 현대의 이스라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 두 견해는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와 ‘대체신학(replacement theology)’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비판을 가한다.

나는 이곳에서 이스라엘을 보는 바람직한 성경적, 신학적 관점에 대해 논쟁을 하고 싶지 않다. 단지 이스라엘에서 오랫동안(18년) 유학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경험과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함께 나누고 싶을 뿐이다.

나의 이스라엘 유학 생활은 1989년 가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유대인 지역에서 방을 구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게다가 팔레스타인 지역은 방세는 물론 물가가 비교적 저렴했기 때문에 베이트 하니나라는 팔레스타인 마을에서 이스라엘에서의 첫 삶을 시작했다. 그 지역은 얼마 전 극우파 유대인들에게 납치되어 산 채로 불에 타 죽은 팔레스타인 청소년이 살던 마을이며, 그 소년은 바로 나의 아들의 친구인 위샘(Wisam)의 사촌동생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과의 두 번째 인연은 1997~98년 IMF 때였다. 당시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하여 일부 유학생들이 잠시 한국으로 떠나기도 했는데, 우리 가족은 다른 두 한인 가족들과 함께 에르 람(성경의 라마)이라고 부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그 지역에서 8개월간 생활하면서 팔레스타인들이 겪고 있는 온갖 어려움과 애환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과의 세 번째 인연은 2002년 7월 31일이었다.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 구내식당에서 테러가 있었으며, 당시 9명이 사망했고 8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 때 나는 다른 두 명의 한국인과 함께 중상을 입었고 당시 나는 약 27일간 무의식 상태에 있었다. 3개월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네 차례의 피부이식수술과 두 차례의 고막재생수술 포함해), 3년간 재활치료를 받았다. 팔레스타인과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인연은 매우 우호적이었으나, 세 번째 인연은 상상하기조차 싫은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팔 모두 인간이다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선지가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인 것처럼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 사람 역시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천하보다 귀한 것은 사람의 생명이다. 이것은 인도주의적 발상이 아닌 지극히 성경적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생명의 소중함을 논할 때 우리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구분을 지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이유에서건 생명을 경히 여기는 생각과 행동은 용납될 수 없다. 세 명의 유대인 청소년이 피랍 살해된 것도, 한 명의 팔레스타인 청소년이 살해된 것도, 이스라엘 군인들이 사망한 것도,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죽임을 당한 것도, 어느 것 하나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참으로 안타깝다.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 지적하는 나단 선지자와 같은 지도자가 없는 것일까.

두 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만일 지금 이 시각 예수께서 이스라엘 땅에 계신다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약 2000년 전 예수께서 이스라엘 땅에 계실 때, 그 분께서 몸소 보여주셨던 삶의 모습과 가르침을 통틀어 볼 때, 예수께서 지금 현재 이스라엘 땅에 계신다면 가장 먼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고통과 애환 속에 있는 그 곳을 향해 달려가실 것이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를 기억한다. 예수의 눈물은 웅장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이 아니라 진정한 샬롬(평화)의 부재에 대한 눈물이었다. 예수의 눈물은 주후 70년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 이 시각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문제까지 예견하시고 흘리신 눈물이 아닌가 싶다.

땅보다 예수의 마음 생각할 때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가르침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결국 ‘땅’ 문제로 연결됨을 알 수 있다. 현재 예루살렘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슬람교의 황금 사원이 있는 그 자리 때문이다. 그 자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 산의 정상이고, 솔로몬 성전이 있던 곳이며, 스룹바벨 성전과 예수 당시에 성전이 있던 바로 그곳이다.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자리에 이슬람교의 사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바로 모든 갈등의 출발점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을 탈환하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 중의 하나가 바로 십자군 전쟁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이 말은 유대인들로부터 소외당한 사마리아 땅을 찾아가신 예수에게 사마리아 여인이 한 말이다. 그 때는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슬람교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땅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가르침을 통해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과 같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이 중요하며, 예수께서 친히 성전이 되시며 예수를 따르는 성도들이 성전이라는 사실이다. 땅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슬람교와 유대교와 같이 기독교에서도 그와 같은 사고를 버리지 못한다면 십자군 전쟁이라는 역사적 과오를 다시 한번 더 저지르게 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는 이 상황에서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만일 현재의 상황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성경이나 신학이 이용된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신학적 논쟁보다 예수의 마음을 다시 한번 더 깨닫고 그러한 마음을 소유하도록 몸부림쳐야 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을 흘리신 그 분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고 헤아리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리라.

 

권성달 교수(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웨신대 기획처>


목록